퀘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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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만남은 단연 퀘이커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어느 주말 런던 외곽에 있는 브릭레인 마켓을 가던 길이었다. 여느 때처럼 이층버스를 타고 가다 다른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내리려는데 갑자기 정류장이 바뀌었다. 간혹 도로 공사 등이 있으면 노선과 다른 정류장에 세워주곤 했는데 그날은 인근 화재로 일정 구간 도로가 통제된 상황이었다. 결국 버스에서 내려 갈아타려는 버스가 있는 정류장까지 걸어가야 했다. 낯선 길옆으로 모범생처럼 생긴 오래된 건물 하나가 다소 독특하게 느껴졌다. 그리 크지 않은 직사각형의 검은색 표찰에 흰 글씨로 '프렌즈 하우스'(Friends House)라고 쓰여 있었다. 좀 더 살펴보니 '퀘이커스'(Quakers)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아, 퀘이커 예배당이구나.


"퀘이커는 믿음의 형식이 아닌 삶의 방식을 나눕니다." 건물 앞 안내판의 첫 문장이 매우 강렬하게 다가왔다. "우리의 연합은 공동의 고요함을 추구하는 침묵 예배에 기반합니다. 고요함으로 시작한 우리의 믿음은 행동이 됩니다. 평화, 평등, 간소, 지속 그리고 진리에 대한 퀘이커의 헌신은 존재의 중심에 사랑이 있고 모든 인간은 특별하고 평등하다는 신념으로부터 나옵니다." 누군가를 초대하는 말이라기엔 너무 수수하지만 그래서 더 호감이 갔는지도 모른다. 모임 시간을 확인하고 먼 길을 되짚어 일요일에 다시 방문했다. 4층짜리 건물의 2층 한쪽에 마련된 방 하나. 작은 탁자를 중심으로 빙 둘러 의자가 대여섯 줄 동심원을 이루고 있었다. 의례적인 인사말 하나 없이 함께 긴 침묵을 지키는 시간, 그것이 퀘이커의 예배였다.


우연히 발견한 프렌즈 하우스가 퀘이커의 영국 본부쯤 되는 듯했다. 건물 중앙에 큰 강당도 있어 여러 모임에 사용되지만 크기 때문인지 일요일 예배는 작은 방에서 이뤄졌다. 첫 참석자가 방에 들어온 순간 시작된다는 예배는 아무런 순서가 없었다. 찬양도 기도도 설교도 그저 끝나기 전쯤 한두 명이 일어나 주중에 자신이 경험했던 특별한 순간을 나눈 게 전부였다. 사오십 명 정도 되는 참석자들은 그저 자기 자리에 앉아 끈질기게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간혹 코 고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으나 다들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12시 정각이 되자 중앙에 앉은 두 명의 남자가 악수하는 것을 신호로 주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몇 가지 광고가 전달된 후 모임이 끝났다. 몇 줄의 글로 다 담아내기 어려운 매우 독특한 모임이었고 분위기였다.


퀘이커는 1547년 영국인 조지 팍스가 시작한 개신교의 한 부류로 기존 교회가 지닌 형식이 없어도 내면의 빛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아무런 형식도 없고 일체의 질서나 신조 등을 인간이 만든 것으로 배격하는 듯했다. 자신들을 '친구'라 부르고 모임을 '친구들의 모임'(Society of friends)이라 하지만 조롱하는 의미로 불렸던 퀘이커도 기꺼이 사용하고 있다. 조지 팍스가 '진리의 말씀을 듣거든 떨라' 한 것을 두고 '떠는 자'라는 의미의 '퀘이커'(Quaker)라 부른 게 이름이 된 셈이다. 이런저런 궁금한 점을 사람들과 나누다 퀘이커에 대한 책자 한 묶음을 들고 일어섰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차분하게 살펴보기로 했다. 짧은 시간 주마간산격으로 경험한 게 전부이지만 강한 인상이 남았다. 교회가 온갖 다른 일과 형식에 정신이 팔린 시대라 더욱 그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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