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깎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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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지금껏 내 머릿속에 '풀 깎기'란 일정이 들어있어 본 적이 없네. 틀 안에서만 살아오다 보니..."


오전에 회사 선배와 카톡으로 한담을 나누다 들은 말이다. 오후에 풀 깎으려 한다는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도 그랬다. 활골에 내려와서야 처음으로 풀을 베어봤다. 이젠 동네 어르신들 예초기까지 손봐줄 정도가 되었지만, 심지어 군대에 있을 때도 풀을 깎아 본 적이 없었다. 행정병이라 그랬던 듯하다. 말년쯤 되어서는 이런저런 작업에 손들고 나섰지만 어인 일인지 풀을 깎아본 기억은 없다.


지금은 풀 깎기가 일상이다.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으려면 정기적으로 풀을 열심히 잘라내야 한다. 그대로 두면 풀씨가 맺게 되고 바람불어 날리면 여기저기 퍼지기 때문에 민폐가 될 수도 있다. 올여름은 많이 가물었던 탓에 - 작물에는 최악이었지만 - 풀 깍기는 여러모로 수월했다. 예초 횟수는 강우 횟수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비가 자주 내릴수록 풀은 더 잘 자라고 그만큼 자주 깎아주어야 한다.


벌초도 처음 해봤다. 결혼하고는 외국서 살았던 데다 이런저런 이유로 집에선 벌초할 기회가 없었다. 앞으로도 그렇겠구나 했는데 갑자기 기회가 생겼다. 바로 엊그제다. 기본적으로 예초와 다르지 않았다. 단지 장소가 묘지라는 차이만 있을 뿐. 이날 벌초는 우리가 다니는 교회 맞은편 땅 사용료였다. 교회에서 아이들 놀이터로 사용하는 땅이 어느 문중 소유인데 그쪽 묘를 벌초해주는 조건으로 써온 것이었단다.


그동안 목사님 혼자 벌초하셨다는데 올해는 내가 동행했다. 교회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언덕이었다. 무덤이 있는지조차 가늠 안 될 정도로 풀이 우거지고 나무가 무성했다. 두 대의 예초기로 한참을 작업한 후에야 묘가 드러났다. 비석을 살펴보니 8년 전 서른두 살과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젊은 부부의 묘인 듯했다. 아마도 자식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부모가 양지바른 그곳에 묻어주지 않았을까 싶다.


언젠가 가스 예초기 샀다고 활골닷컴에 알렸을 때 양수리님이 '마당에만 쓰기 아까우니 가끔 이웃집 마당이나 길가 잡초도 베어주면 더 사랑받을 거'라고 했는데 이렇게 활용 중이다. 엊그제는 누군지 모르는 이의 묘를 벌초했고 오늘은 우리 마당의 풀을 깎았으며 모레는 마을 부역에 나설 참이다. 풀과 함께 사니 풀 깎기와도 더불어 지낸다.


  • 양수리

    2018-09-15 23:40
    한참 풀을 깎다보면 몸은 기계처럼 움직이지만 머릿속은 전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합니다. 운전할때도 가끔 그렇듯이 몸과 생각이 따로 놀고 있는 거죠. 엔진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는 것같이 아주 고요한 상태로 머릿속을 정리하는 시간을 즐기는 건가 봅니다. 오늘 선물받은 캔들홀더는 여기서 사진으로 본 것보다 실물이 훨씬 이뻐 자꾸 만져보게 되네요. 물건도 소중하지만 들인 시간과 애씀에 감사드려요.
  • 내일

    2018-09-17 07:06
    공감합니다. 경험해 본 사람만 아는 느낌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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