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

나는 로또를 사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기본적으로 요행을 바라지 않고 불로소득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스베이거스에 갔을 때도 그 흔한 슬롯머신에 동전 하나 넣어 본 적 없다. 토지공개념이 개헌안에 오르내리기 전부터 찬성했고 헨리 조지의 사상을 적극 지지하는 조지스트였다. 내 이름으로 땅이나 집을 소유해본 적도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러나 로또를 받은 적은 있다. 순전히 타의에서다. 미국에 살 때, 벨 헬리콥터에서 통역 일을 할 때였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한국의 A 방송사와 B 소방본부에서 70억쯤 하는 헬기를 한 대씩 사 갔다. 계약조건에는 신형 헬기에 대한 4주짜리 교육이 포함되어 있었다. 얼마 후 기관별로 2명씩 총 4명의 엔지니어가 한국에서 교육받으러 왔다. 원래 통역은 한 명이 전담하기로 했으나 한국에서 온 '갑'들이 마뜩잖아했다. 두 개의 회사에서 왔는데 왜 통역이 한 명이냐는 단순한 논리였다. 결국, 급하게 통역이 한 명 더 추가되었고 그게 바로 나였다.


A 방송사 통역은 나이 지긋한 C 아저씨가 맡았고 나는 B 소방본부 통역이었다. C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재밌는 사람이었다. 교육 첫날, 고국에서 온 손님들에게 큰 선물을 주겠노라며 로또를 사 왔다. '메가밀리언'이라는 이름의 로또는 한 장에 1달러였다. 다해봐야 6달러, 우리 돈으로 7000원에 불과하니 큰돈 들이지 않고 생색내기에 안성맞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온 엔지니어들은 미국 로또를 처음 본다며 좋아했지만 나는 탐탁지 않았다. 다만, '밀리어네어'를 꿈꾸는 갑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있었을 따름이다. 대개는 교재 속 책갈피로 사용했다.


C는 로또를 매주 돌렸다. 월요일 교육 시작 전이면 새 로또를 나눠주는게 주례행사였다. 화이트 보드 구석에 마치 암호처럼 지난주 당첨번호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강사들도 처음엔 뭔가 하더니 이내 눈치챈 듯 빙그레 웃곤 했다. 엔지니어들은 주섬주섬 자신의 로또를 꺼내 번호를 맞춰보고는 이내 허탈한 웃음을 짓기 일쑤였다. 영어 강의와 한국어 통역으로 지루한 교육 가운데 잠깐의 활력소가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땐 그게 다인 줄 알았다. 사건은 교육 종료를 며칠 앞둔 마지막 월요일에 일어났다. 그날따라 화이트 보드 속 당첨번호가 어딘가 낯익어 보였다. 마지막 숫자를 또렷이 기억한 탓이다. 우연이었겠지만, 바로 내 생일이었다.


설마가 사람을 잡는 일이 벌어졌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로또에 당첨된 것이다. 잭팟이었다. 나중에 전해 들은 바로는 당첨확률이 2억5천만 분의 1이었단다. 나는 그날 교육이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무슨 강의를 어떻게 통역했는지 모르겠고 어떻게 운전해서 집에 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자의로 로또를 사본 적이 없고 불로소득을 반대하는 내가 로또 당첨이라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평정심을 회복하기까지는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했다. 긴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면, 당첨금은 삼십몇 퍼센트 정도의 세금을 제하고 일시금으로 받았다. 구체적인 금액을 밝히기는 적절하지 않으니 대충 100억이라 해두자. 아내와 나는 오래 고심한 끝에 그 돈을 쓰지 않기로 했다. 우리가 좋아하는 식당에서 가장 비싼 햄버거를 먹은 게 전부였다. 남은 돈은 모두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D 신탁회사에 맡겨두었다. 70년이 지나면 우리가 다녔던 대학원에 익명으로 전액 기부되도록 했다.


엄청난 결정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저 로또 당첨으로 인생이 영향받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간혹 신문 가십난에 등장하는 것처럼 흥청망청하다 불행한 결말을 맞을까 저어한 면도 크다.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인생이란 게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만은 아니니 뜻하지 않은 불운을 만날 수도 있을 게다. 바로 그럴 때를 대비한 안전장치가 신탁이었다. 비싼 로펌 변호사가 알려준 조언이었다. 좀 복잡하지만 필요하다면 위탁자로서 꺼내 쓸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둔 셈이다. 그동안 몇 차례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단 한 번도 그 계좌를 건드리지 않았다. 지금도 전혀 그럴 생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듯하다.


우리는 로또 당첨과 무관하게 애초 계획대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붙잡는 회사를 관두고 영주권도 마다한 채 귀국하는 우릴 의아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한국에 물려받을 회사라도 있냐고 농반진반으로 묻는 사람도 있었다. 단언컨대, 그 어느 순간에도 로또는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꿈꾸던 바대로 우리가 선택한 삶을 살고 있다. 자본주의 열차에서 내려 시골에 들어온 이후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땀 흘려 번 돈으로 생활하고 여기저기 후원도 하며 조금씩 저축도 한다. 때론 예상치 못한 지출 탓에 허리띠를 졸라매기도 하지만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우리에게 일어났던 그 사건을 지금 밝히는 이유는 우릴 걱정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귀촌해 산골에 사니 노후를 염려하거나 때론 참견하러 드는 이들이 있다. 대개는 돈이 사람을 지켜준다는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의 의견은 존중하지만 동의하진 않는다. 뜻하지 않은 로또를 제외한다면, 내세울 만큼 부유하지 않지만 남에게 손 벌릴 만큼 가난하지도 않다. 그래서 일상의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 여전히 요거트 뚜껑을 핥아 먹고 간만에 산 초콜릿 케이크 하나에 즐거워한다. 인생에서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다고 믿는다. 우린 불필요한 풍요를 포기하고 평온한 일상을 택했을 따름이다. 부유하다고 하루에 열 끼 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했다간 건강만 해칠 뿐이다. 우리 인생을 책임지는 것은 얼마가 들었든 통장 잔액이 아니다. 그보다는 1시간의 아침 조깅이 더 쓸모 있을지도 모르겠다. 로또는 그저 운명이 인생의 길섶에 던져둔 장난이지 내 몫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쯤에서 마무리 해야 할 듯하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느라 애먹었는데 이렇게 공개하니 속이 후련하다. 나름 우리와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철저히 감췄다고 서운해하지 마시라. 우리도 매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앞으로도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다. 누구라도 밖에서 이 사건을 묻는다면 우린 부인할 것이고 언젠간 이 글도 지울 것이다. 다만, 누군가 우리 노후를 염려한다면 귓속말로 조용히 말해줄 생각이다. 이거 비밀인데, 우리 로또 당첨됐었다고. 태평양 건너 어느 신탁회사에 평생 다 쓸 수도 없을 만큼의 돈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사실, 우리는 이미 그 돈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으니 있으나 없으나 다를 게 없다. 당신은 어떠신가. 100억이 있는 우리와 없는 우리, 어느 쪽이 더 안심되시는가. 편할대로 생각하셔도 괜찮다. 다만 비밀만 지켜주시라.


뱀발 : 다들 아시겠지만, 오늘은 만우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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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움

    2018-04-01 18:19
    우리는 알고 있지. 인생의 주관자가 이 땅에 오셨고 지금도 함께 하시며 다시 오실 것을... 오늘은 부활절!!
  • 제비

    2018-04-01 20:17
    저도 지리산으로 이사오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저는 반대로 노후까지 먹고 살 걱정 없이 한 몫 쟁여 놓고 사는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합니다.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너무 궁색하지도 여유롭지도 않게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저 추운 겨울 난방기름 값 때문에 추위에 떨지 않고 공과금 내면서 살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읍내 나가서 아이스크림 큰 통 하나 사고 저녁 반주 소주 한 병이면 금상첨화이고요 ㅋㅋ
  • 내일

    2018-04-02 17:36
    Ch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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